인물2 우에마츠

딸에게! 우주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

2019. 3. 4. 02:20

따오기에게

 

우주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



㈜우에마츠전기 (NASA보다 가까운 동네 로켓공장)

박준성 올림



따오기와 로켓 그리고 제주도 푸른 밤.



따오기(보아)에게, 


 아빠가 일본에 온지도 거의 1년이 다되어 가는구나! 이번 주는 일본 로켓의 성지 '타이키쵸'에서 로켓을 쏘고, 다음 주에는 아빠와 함께 잠수정을 개발했던 지도교수님을 뵈러 동경대에 출장을 갔다가, 다다음 주 그 무엇보다 소중한 보아의 돐인데..... 가지 못해 미안하구나! 그대신 4월에 온통 푸르름이 가득한 제주도에 바다와 곶자왈 신록을 보러가자. 

얼마전 서울여대 교수님이 할머니 쾌차하시라고 5만원을 봉투에 넣어 주고 가셨단다. 그 사실은 엄마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과정은 전혀 알 수가 없었지. 인터넷으로 우연히 보게된 그 교수님의 장문의 글을 통해 그 과정도 알게되었고 그가 참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란 걸 새삼 느끼게 됐단다. 그는 가게를 찾아왔다가 가게가 철거된 걸 보고 50년 역사와 추억을 지닌 가게가 없어진 줄 알고 크게 실망했었단다. 나중에 현재 옮긴 장소를 알게 되어 찾아오는 길에 혹시나 할머니가 돌아가신 줄 알고 돈 봉투를 2개를 준비했다는구나. 하나는 조의금, 하나는 혹시 아직 살아서 투병중인 상황을 고려해 문병위로금을. 


가게에 찾아와서 할머니가 극적으로 회복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돈을 문병 위로금 봉투에 몰래 넣어 드리고 갔단다. 그는 치마를 입고 다니는 교수로 서울여대에 뿐만 아니라 방송에도 출연해 유명했었지. 치마를 입고 다니는 이유가 '여대생의 고충'을 자신이 치마를 입어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직접 실천한 것이라 하니 정말 섬세한 사람이지. 자신이 별로 떡볶이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제자들을 데리고 가게까지 찾아와 단체회식을 한 건 서울여대와 육군사관학교의 추억이 담긴 이 역사적인 가게의 맛 이외의 다른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을 거야. 과연 미술과 교수라 할만해. 미술이란 현재의 상식이 아닌 당시의 파격을 볼 줄 알아야 하거든. 일본의 사진계의 거장 아키라는 현재로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진들이지만, 당시 자신 부부의 일상을 사진으로 기록했는데 이게 당시로선 미술(예술)이 되었지. 왜냐면 그 당시엔 현재처럼 일상을 마구 사진으로 찍어 페북이나 인스타에 올리는 문화는 없었거든! 그 교수님은 소라분식에서 맛이 아닌 다른 것(추억, 역사, 여대생의 흔적 등)을 볼 수 있는 미술가적 눈을 가졌을 거야. 


 그 교수님의 장문의 글을 통해 그가 할머니께 위로금을 전달한 경위가 어떠했는지 알게됐지. 얼마나 따뜻한 마음을 가졌으며 얼마나 두근거리며 찾아왔는지 그 과정을 아주 잘 전달하고 있었단다. 실은 아빠도 어떻게 우주사업이라는 세계에 발을 담그게 됐는지 그 과정을 알고 싶다는 사람이 참 많았단다. 할머니가 사고를 당하신 직후에 일본의 일론머스크인 우에마츠씨에게 쓴 편지에 그 과정이 자세히 남아있단다. 지금까지 비밀로 하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는데 그 과정을 오늘 어린이날(히노마츠리) 보아를 생각하며 선물로 공개할께. 그때 아마 쉬지 않고 일본어로 3시간 동안 쓰고 그걸 편지지에 옮겨 적는 데만 5시간이 걸렸었지. 편지지로 10장이 넘으니까! 그걸 방금 한국말로 번역했단다. 일본어로 먼저 쓴 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건 태어나서 이번이 2번째구나! 처음은 아빠의 박사논문을 한국 지인들에게 보라고 한국어로 번역해 준 적은 있었어. 편지 속에 나오는 지금은 구하기 힘든 책 '우리들의 꿈은 로켓엔진'은 현재 보아 사진 옆에 잘 전시되어 있어. 그리고 그 앞엔 제주도 푸른 밤 소주 2병을 장식해 놓았단다. 무려 2년도 전에 아빠가 적었던 '비전'이 마치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서처럼 지금과 어찌 이리 들어맞는지, 아빠는 노스트라다무스보다 뛰어난 예언가가 아닐까 번역하며 순간 놀라기도 했어. 어제는 새하얀 설원 위에서 카무이모델로켓을 하늘 높이 쏘았단다. 이곳 홋카이도에서나 볼 수 있는 장관이었어. 그러나 아빠의 예언이 맞다면 우리 보아에게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로켓을 쏠 수 있는 장관을 꼭 보여주고 싶단다.  


2019년 3월 3일 일요일

보아를 그리며!

우에마츠전기 12호 선실에서


<우에마츠씨에게 쓴 출사표>----------------------------------------------------------

해군사관학교 교수부 편지지에 쓴 11장의 편지 원본


 2009년 홋카이도대학 박사 2학년 때였습니다. 공학서적을 사러 들른 하코다테 분쿄도에서 'NASA보다 우주에 가까운 동네공장'이라는 책과 만났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책이 좋았습니다. 대학에 입학하고부터 쭉 공학서적 밖에 보지 않던 저는 인문・철학 분야 책들은 등한시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책을 읽곤 제게 새로운 꿈이 생겼습니다. 드디어 박사 3년차, 졸업이 확정된 후, 일본에서의 마지막 여행, 유종의 미를 장식하고자 후배와 아카비라에 있는 그 동네공장에 가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노보리베츠까지 경차 카푸치노로 고갯길과 시골마을을 지나 식은 땀을 흘리며 운전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사논문으로 며칠이나 밤을 새왔던 피로가 누적되어 과로로 급히 하코다테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다음 날, 저는 쓰러져서 하코다테 중앙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꿈에 그리던 아카비라 공장은 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작은 어촌마을 '남해'라는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에는 3~4인승 작은 어선이 있어 어릴 적부터 배를 타곤 했던 저는 배를 좋아했습니다. 어촌마을엔 한일문제와 같은 정치문제도, 금리나 부동산투자 등과 같은 경제문제도 없는 그저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었습니다. 그 속엔 어민과 바다 그리고 물고기라는 화제거리만 있는 어촌이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고등학교까지 졸업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치원은 가기 싫어져 도중에 자퇴했습니다. 그러나 초등학교와 중고교는 자퇴하고 싶었지만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심한 이지메를 1년 동안 당해 정신적으로 쇼크상태에 있었습니다. 10명 정도의 급우로부터 매일 학교 뒷 골목에서 집단 폭행을 당했습니다. 도시락도 싸오면 뺏기기 때문에 도시락도 싸올 수 없어 학식에서 라면을 먹을 마음으로 어머니한테 매일 점심값을 받았습니다. 그 돈을 아껴 모형 잡지며 컴퓨터 잡지등과 같은 책을 샀습니다. 구출해주리라 믿었던 담임선생님과 어머니한테까지 이지메 사실은 무시되었고, 오히려 체벌을 당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결국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한국의 군대식 집체교육, 예를 들어 성적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는 성적지상주의에 성적이 나쁜 아이는 개성이 있어도 몽둥이로 체벌당하는 문화, 전체가 공통의식을 가지며, 개인이 다른 행동을 취한 경우 연대책임을 지는 문화, 일동경례, 일동기립등 전체가 하나가 되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속에서 동작이 굼뜬다고 체벌당하는 문화등에서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공부는 차치하고 군대 상관같은 선생님의 명령(앞으로 나란히, 열중쉬어 등)에 적응하고 기계화되어가는 것부터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 저는 대학에 들어가 그러한 집단행동도 없이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아주 행복했습니다. 친구들과 기숙사에서 새우깡과 소주로 밤새워 얘기도 하고, 때로는 같이 밤새워 공부도 했던 아주 행복한 환경이었습니다. 노력하면 뭐라도 할 수 있는 차별이 없는 곳, 개성을 인정해주는 곳이었습니다. 일본대학에서 해양조사선이 입항하면 저는 매년 통역을 담당해 한일교류를 넓혔습니다. 어느 해, 우리과 전원을 모아놓고, 일일호프를 열었습니다. 카고시마대학생들이 실습선을 타고 올 것이라는 걸 알고 그들에게 한 턱 쏘기로 했기 때문이었죠. 실습선이 출항할 때 국제부두로 마중을 나가 배가 지평선 뒤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고, 태평소를 불며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어느 날, 홋카이도대학에서 실습선이 와, 항상 그래왔듯 한일교류 파티 사회와 통역을 맡아, 그들이 있는 5일간 친구가 되어 서로 꿈을 말하며 친해졌습니다. 그때 지도교수로 왔던 자누마교수님께 일본에 유학가고 싶다는 뜻을 말했습니다. 자누마교수님은 1년간 학부유학 서류준비를 도와주셔서 저는 대학 4학년 때부터 홋카이도대학 부체공학연구실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박사까지 쉬지않고 진학해, 잠수정 연구를 석박사 테마로 변함없이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일본어에서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동네공장'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동네공장을 찾기 어렵습니다. 굴러온 돌이 박힌돌 뺀다고 동네공장으로 활기가 넘쳤던 동네도 나중에 생긴 아파트 주민들의 반대로 동네공장은 동네에서 추방당하고 있습니다. 아파트라는 깨끗하게 정돈된 주택만 존재하고, 정녕 기계를 만들며 사람들을 편리하게 해준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은 더럽다는 인식만으로 자기집 주위에는 안된다는 동네에 희망이 싹틀까 희의를 품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일본에 와서 눈으로 확인한 동네공장은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단순히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공장이 있을 뿐인데 저에게는 너무 감동적이어서 제대로 잠을 청할 수 없었습니다. 박사 과정 때, 잠수정을 제작했을 때에도 홋카이도대학 뒷 길에 있었던 자그만 전자회사에 1년이상 자전거로 쉴 새 없이 왔다리갔다리하며 제작했습니다. 부품 하나하나 전부 제 손으로 고르고 납땝해 완성했습니다. 종업원 10명도 안되는 작은 공장이었지만, 고졸 사장이 너무 멋져보였습니다. 부러워보였습니다. 그런 공장을 경영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박사 졸업 후, 한국 해군사관학교라는 대학의 기계조선공학과에서 4년간 조선공학을 가르쳤습니다. 리조트와 같은 환경은 너무 멋졌고 다니는 생도들도 엘리트라 불리는 우등생들이었습니다. 모두들 그런 환경에서 근무하는 저를 부러워하며 평생 그곳에서 근무해라며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조선공학을 가르치는 보람은 있었지만 그저 정돈되고 깨끗하기만 한 교실과 실험실, 실험과 제작이 빠진 이론뿐인 교육에 저는 가슴의 두근거림은 이미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동네공장에서 로켓과 선박을 만들고 싶어! 역시 현장이 좋아! 종국엔 제가 동네공장을 만들어 아들에게 기술계승을 시키고 싶다는 '장인 에스프리'라는 진짜 꿈이 끓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결심을 일으키게 한 장본인이 우에마츠씨입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4년간 교수생활을 끝내고, 테헤란조선소주식회사를 설립했습니다. 테헤란이라는 말은 이란과는 무관하며, 한국에서 벤쳐기업의 성치라 불리는 서울 한 복판의 지명입니다. 미국의 실리콘벨리, 동경의 빗토바레와 같이 기업가와 IT기업들이 많이 운집한 유일한 장소입니다. 아무도 하고자 하지 않는 동네공장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깨끗한 IT기업만이 사업을 일으키는 테헤란에서 조선과 우주라는 전통적인 굵직굵직한 제조업도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 소망이 있었습니다. 제 테헤란조선소의 블로그에는 목표로 '우주선개발'이라 당당히 쓰여져 있습니다. 조선소에서 우주선을? 이렇듯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많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잠수정, 위그선, 비행기, 우주선,... 이 모든 비히클(탈 것)을 저는 선박이라 생각합니다. 비행기의 기장을 캡틴이라 부르는데 선박의 선장(Captain)에서 그 말이 유래되었습니다. 비행기의 좌현을 포트라고 부르는 것도 선박의 좌현(port)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또, 승무원을 지칭하는 크루는 선박의 선원(crew)에서 유래되었고요. 비행기는 비행기가 아직 세상에 나오기 전, 조선공학자로부터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우주선은 비행기 공학자로부터 태어났습니다. 비히클(탈 것)을 해상에 나아가도록 만들면 선박, 하늘에 날 수 있도록 만들면 비행기, 진공 중에 날 수 있도록 만들면 우주선, 심해에 잠수할 수 있도록 만들면 잠수선이 됩니다. 즉, 모든 탈 것은 선박이며 그에 유래되었습니다. 


 박사 과정 때, 지도교수님이었던 요시무라 교수님은 범선설계에서 비행기설계까지 모두 맡은 적 있는 교수님이었습니다. 그 때, 제게 이렇게 말하며 비행기 운동역학이라는 책을 빌려주셨습니다.

"이것만 읽으면 비행기와 잠수정이 똑같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거야."

이 책 속에는 6자유도운동방정식이며 비행기 제어에 관해 기술되어 있었는데 놀랍게도 요시무라교수님이 비행기회사 연구소에서 비행기 설계에 관여했었던 30대 젊은 연구자 시절 사진이 끼워져 있었습니다. 


 올해 5월 테헤란로에서 경영자 대상으로 2시간정도 강연을 했습니다. '우주에 범선을!'이라는 테마였습니다. 일본의 이카로스라는 우주요트 '솔라세일'을 소개했습니다. 저는 강연 중에, '제가 선박도 비행기도 우주선도 만들겠습니다!'라 말하자 듣고 있던 어떤 경영자 분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무엇이든 다 만들 수 있는 분이네요. 그렇다면 솔라밧데리도 좋은 사업이니, 이 사업도 같이 넣읍시다!"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선박, 우주선, 비행기, 자동차....다 만들 수 있다고 하니, 저를 만능박사라 오해하실 지 모르지만, 실은 이들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서 전부 같은 대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로 운동체(비히클)의 속도, 가속도, 위치등을 계산하고 예측하는 학문, 고전역학이라는 범위에서 전부 기술할 수 있는 분야입니다. 따라서 저는 만능박사가 아니라, 운동체라는 물건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테헤란조선소는 1인기업입니다. 지금까지의 제조업은 어렵고 복잡한 제조기술을 지닌 장인과 그러한 사람이 고용된 공장이 있어야 가능했었습니다. 지금부터는 3D프린터가 그러한 일을 대신하려는 미래로 향하고 있습니다. 일전에 은행에 운용자금을 빌리러 갔었습니다. 사명을 묻자, 테헤란조선소라 대답한 순간, 은행원의 표정이...... 그의 표정에서 밝게 응대했던 웃음은 사라져있었습니다. 마치 제가 범죄자 취급된 기분이었습니다. 한국 조선소가 세계 톱4에 전부 랭크인되었을 적에는 조선공학을 한다고 하면 애국자처럼 대접받았습니다. 그러한 인식이 부담을 느낄 정도였던 적이 수 년 전 일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이렇게 변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명에 일부러 '조선소'라는 '(지금으로선) 위험한, 낡은, 가능성이 없는'이라는 마이너스 인식과 연결되는 전통적인 사명으로 정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가 오히려 '조선소'라는 말에서 가능성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다름없습니다. 대형선 사업은 몰락했을지 모르지만, 요트와 같은 개인고객(BtC)은 앞으로 성장하리라 생각합니다. 또 조선이라는 낡은 산업도 IT가 더해진다면, 설계(Ship design)만 사람이 하면 배 제작 공정(Shipbuilding, 조선)은 3D프린터가 마음대로 해주는 시대로 변할 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제조업이라는 인식 속에서 '낡고, 위험하고, 어렵고, 더럽다'라는 단어를 없앨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3D프린터로 선박을 만드는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목제 범선 모델키트개발도 하고 있습니다. 우에마츠씨는 '프라모델 장난감 가게'를 하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저는 지금 그것을 이미 하고 있으니 제가 우에마츠사장님 꿈을 앞서가고 있는 게 아닌지 깜짝 놀랬습니다. 프라모델이 아닌 우드모델이긴 하지만....


 한국에는 5년정도 전에 생긴 사회현상을 대변하는 유명한 유행어가 있습니다. '3포세대'라는 말입니다. '포'는 한국어로 '포기하다'라는 의미의 말인 '포기'의 두문자입니다. 지금 젊은이들은 경제난으로 고통을 받고 있어 3가지를 포기할 수 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 3가지란 연애, 결혼, 출산입니다. 시대가 지나고 그것이 4포, 5포, 현재 9포까지 증가했습니다. 한국 젊은이들은 꿈이 없습니다. 장차 대통령이 되겠다, 과학자가 되겠다, 노벨상을 타겠다라며 원대한 꿈을 말했던 때는 10년도 전의 일입니다. 지금 젊은이는 노벨상은 차치하고 잘 다니던 대학마저 관두고, 종국엔 4수5수까지 해가며 공무원이 되려고 합니다. 도서관에 가면 9급공무원이 되려고 공부하고 있는 우수한 대학생으로 자리가 꽉 차있습니다. 서울대도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제가 일본에 유학했을 당시, 동기나 후배가 공무원이 된다고 말하면 그를 이상한 아이취급했던 상황과 현재 한국의 상황이 너무 달라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저는 현재 집도 없고 장인장모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재산도 제로입니다. 일주일전 교통사고로 스쿠터를 타던 장모님이 반대차선에서 오던 차량과 머리를 부딪쳐 두개골과 안면, 두 팔, 갈비뼈 골절과 안구가 터지는 대형사고를 당했습니다. 지금 생사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한 쪽 눈은 적출수술을 받았습니다. 의식도 없습니다. 재산은 커녕 빚을 1억원 지게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내는 현재 기술경영대학원 연구를 관두고,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떡볶이집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않고 일하고 있습니다. 떡볶이집은 3대째 50년에 걸쳐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제가 설립한 조선소는 4000원짜리 떡볶이를 판매해 장모가 1년간 지원해주셨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저는 꿈이 있습니다. 포기할 수 없는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에마츠씨처럼 용기와 꿈과 미래를 잃어버린 한국의 청년들에게 꿈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부디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저를 우에마츠전기에 채용해주세요. 그래서 저는 한국에도 우에마츠전기 정신을 물려받은 기업을 만들어, 아이들과 청년들에게 꿈을 안겨주고 싶습니다. 로켓은 지금은 전혀 지식이 없지만, 시다바리부터 시작해 공부하며 성장해나가겠습니다. 볼트로 조으로 납땜해가며 온갖 잡일까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저의 비젼

제 최종적인 비젼은 우주개발을 통해 한국만이 가진 국지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규모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주개발이라는 과정 속에서 아이들과 청년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제가 태어난 고향은 아주 작은 어촌마을에 불과했습니다. 매일매일 그물을 던지며 살아가는 아주 국지적인 어업이라는 작업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어부들은 나날의 어업 활동 속에서 지구문제를 생각했습니다. 물고기가 전보다 그물에 걸리지 않으면 지구규모의 환경문제에 그 생각이 미치기도 하였으나, 다른 나라를 원망한다거나 이웃주민과 싸운다거나 하는 국지적인 행동은 거의 없었습니다. 여기 사업의 답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행동(삶:어촌에 거주)은 작게, 향하는 눈은 우주(사업:우주개발)로'

바로 이것이 제가 생각한 사업형태이자 철학입니다.


 이 편지를 쓰고 있던 저번주, 장모님은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일본에 가서 열심히 노력해서 꿈을 실현해라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병마와 싸우고 있는 장모님과 할머니 생각으로 괴로워하던 저에게 아내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에 힘을 얻어 꿈을 미루지 않고 '지금 당장'시작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내년 4월부터 약 1년간 우에마츠전기에서 일한 다음, 한국에 귀국해, 먼저 기술사업화(MOT)등 거대한 우주개발을 시작하기 전에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교육사업을 런칭하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4년전 'NASA보다 우주에 가까운 동네공장'을 번역출판하려고 했습니다. 얼마 후 번역을 거의 다 끝냈을 무렵, 출판사에 전화했습니다. 출판사로 부터 이미 그 책은 번역되어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안타까웠는지요. 

이에 포기하지 않고 다음 작품으로 '도전자의 에스프리'라는 테마로 우주에 관한 전집을 출판해 청년들에게 꿈을 심어주고자 했습니다. 그 때, 소설 '달동네로켓'과 우에마츠씨의 '우리들의 꿈은 로켓 엔진' 이 두 권의 책을 전집의 스타트로 기획했었습니다. 연락했던 출판사는 한국에서 유명한 대형출판사인 ***였습니다. 출판사 사장님은 제 기획서에 아주 동감해 출판하자고 약속했지만, 아무 조치없이 1년이상 허송세월을 보냈습니다. 기획당시, 라이센스가 살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년간 아무 조치를 하지 않은 결과, 출판권이 다른 출판사로 넘어가 우리들은 결국 출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뒤 ***출판사 사장님으로부터 장문의 사죄의 편지를 받곤 우리들의 기획은 종료되었습니다.


 우에마츠씨! 제게 우에마츠 에스프리를 한국에서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요. 저는 우에마츠씨의 책과 동영상으로 몇 번이나 눈물을 훔쳤는지 모릅니다. 저번 주는 지하철에서 강연을 보다가 그만 눈물이 터져나와, 부끄러워 도중에 하차해 끝까지 계속 본 적도 있습니다. 대학이나 학회, 심지어 동네 초등학생한테까지 우에마츠 스토리를 말해오며, 그 에스프리를 전달하길 벌써 7년째가 됩니다. 제 얘기를 듣곤 모두 감동해 그들도 책을 사거나 유투브 동영상을 보며 저처럼눈물을 훔쳤습니다. 


 저의 꿈은 우에마츠씨의 에스프리와 우주를 향한 꿈을 여기 용기를 잃어버린 어린이들에게 널리 알려 그들을 돕고 싶을 뿐입니다. 옛날엔 부자가 되고 싶어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의 웃는 얼굴을 보곤 돈의 많고 적음은 금방 잊게됩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제가 일하며 돈을 벌 수 있는 시간은 한도가 있습니다. 그보다 꿈과 희망을 전하며 어린이들이 즐거워하는 생기발랄한 모습을 보며 느껴지는 감동은 무한입니다. 유한으로 삶을 사는 인생이 아닌, 우주의 품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보며 살며, 어린이들의 해맑은 웃음을 위해 인생을 바치고 싶습니다. 


2016년 10월 17일(월)

(주)테헤란 조선소

박준성


참조.

1. 지식순환협동조합


2. 치마입은 男교수님

https://blog.naver.com/winter28/50006988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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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J(블랙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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