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성/文(학문)

고려불화로 보는 4차산업혁명 그리고 조선업

2017. 10. 3. 03:25

[ 고려불화 그 은은한 장식미 ]



 


고려불화를 읽고 있는 본인을 코스프레한 아들 두루미



 서울의 오래된 분식점에서 떡볶이를 먹고 있었다. 그곳에서 정말 우연히 벤포스타 출판 대표님을 일기일회(一期一會)하여 번역하게 되었다. 역자는 전공이 조선공학이지만, 개인적 취미로 공학서 이외에도 철학, 어류학, 소설, 조각, 생태학 서적 등 다양한 일본 책을 읽고 있다. 그러나, 고고학과도 관련된 고려불화는 그다지 접해보지 못한 분야였다.

읽고 또 읽고 그렇게 일주일 동안 밤새워 3번을 읽었다. 책은 화려한 도판이 충분히 구성되어, 오히려 글이라는 해석 부분이 필요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역자는 한 가지 실험을 해보았다. 처음부터 머릿 속에 떠오르는 상상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 그림을 일체 보지 않고 글만 읽어보았다. 이것은 마치 시각에 장애를 지닌 독자가 옆에서 누군가 그림 내용을 설명만 해주었을 때 감동이 있을까 하는 상황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정답은,


 너무 감동적이었다.”


현존하는 고려불화 160작품 중, 대부분의 작품(130여점)이 일본에 남아있는 건 하나의 의문점을 자아낸다. 조선의 승불억유 정책으로 수 많은 불교 문화들이 불태워 사라진 이유도 있겠지만,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로, 일본과 한국의 기질 차이(문화성)에 있다는 의견도 많다. 한국은 새로운 것을 좋아해 오랜 시간이 지나면 버리고 새로 만드는 반면(寫經), 일본은 오래된 것을 유지보수하면서 간직하는 전통이 강하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누가 더 우월하다던지 하는 문화적 우열성은 거론하지 말자. 새 것을 추구하는 안목, 헌 것을 가꾸어 보존하는 안목, 모두 각자 훌륭한 안목이다. 동경대 강상중 교수에 의하면, ‘비극이 희극보다 위대하다.’라고 했다. 어쩌면 이러한 국민성의 차이로 인해, 고려불화가 타지에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어서, 70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인들이 이렇게 나마 조상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참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이 책에 실린 고려불화들이 그려졌던, 13~14세기, 우리 조선공학계에서는 역사적인 항해가 있었고, 그것은 최근 세계 고고학계에 길이 남을 위대한 발굴로 이어졌다. 바로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수 많은 보물(도자기 등)을 싣고 침몰한 해저 유물선 ‘700년 전의 약속호의 발굴이 그것이다. 700년 전(1323), 수출품을 가득 싣고 중국 닝보에서 출발한 무역선이 일본 쿄토로 향하던 중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그 해역은 야속한 세월이 아니라, 오히려 700년 동안 야외 박물관이 되어 준 셈이었다. 수중 발굴조사로 선박과 이에 실려있던 도자기 20,661점 등이 출토되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고 고고학 역사를 바꾸게도 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어떤 비극적 상황이 없이, 한국에 남겨진 선박 유물은 전무하다. 선박 역시 불화와 마찬가지로 신성시되었으며, 고급 한옥처럼 부유의 상징이었으나, 아무래도 우리 선조들한테는 배가 소모품이라 인식되었던 모양이다. 20년 정도가 지난 전통 목조선박들은 전부 폐선되어 새로 선박을 발주하는 사이클이 반복되어, 고대 선박 컬렉션은 한국에 아직 없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역자가 살던 하코다테 근처, 미치노쿠 북방어선박물관에는 국지정 중요유형민속문화재인 무다마하기형 어선 콜렉션 67척을 포함해, 130척이나 되는 전통 목조선을 전시하고 있었다. 무다마하기형은 부산 낙동강 하구 하단이라는 곳에서 4대째 전통 선박을 만들어 2016 12월 무형문화재 조선장이 되신 김창명 장인(역자는 후계자임)하단 황포돛배와 그 선형이 유사한 일본의 전통 선박이다. 불행히도 하단형 황포돛배는 전국에서 필자가 개인적으로 제작한 한 척을 제외하고는 관공서가 보유한 2척뿐이다. 우리 조상들에게 불화역시 선박과 마찬가지로 소모품이었는지 모른다.



 700년만의 해후 고려불화대전(국립중앙박물관 개최)은 역사적인 날이었다. 일본에서도 공개된 적이 없는 센소지 수월관음도가 세상에 처음으로 현해탄을 넘어 한국에서 공개된 것이었다. 마치 센소지 수장고인 호조몬은 700년 전의 약속호가 잠들어 있던 신안 앞바다와 같이 고려불화를 잘 지켜주고 있었다. 고려불화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혜허스님의 본 수월관음도를 보면, 그 뛰어난 원색의 채색, 투명한 베일의 표현 등 보는 이를 압도한다. 그러나 동시대 다른 나라의 미술과 구별짓는 이러한 기술적 요인들 배채법, 광물계 안료 사용, 여백을 두지 않음, 한 장에 그림, 원색 사용 은 굳이 역자는 거론하지 않겠다. 그것은 누구나 한 번의 감상으로 쉽게 느낄 수 있는 내용이거니와 인터넷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표면적인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본고 이데교수님의 학설을 로 읽으면, 심미안이 생겨, 고려불화를 으로 읽었을 때의 느낌보다 훨씬 큰 감동이 샘솟는다. 즉 고려시대에는 아미타여래 그림이 많이 그려졌는데, 이는 정토신앙과 화엄사상을 융합한 고려불교 독자적인 사상을 보여주는 그림이라는 것이다. 극락정토의 세계와 화엄세계를 잇고 융합시킨 부처인 아미타여래는 마치 현대 4차산업혁명에서 화두인 드론로봇을 떠올리게 한다. 고려시대에는 아미타여래가 지금의 드론과 같은 혁명적 존재가 아니었을까? 4차산업혁명은 창조(creation)가 아닌 융합(convergence)을 말한다. 드론의 각 기술들(카메라, 프로펠러, 센서 등)은 이미 이전부터 존재하던 기술이며, 그 기술들을 모아 드론이라는 하나의 융합 작품을 만든 것이 아이디어의 핵심이다. 고려불화도 마찬가지라 볼 수 있다. 고려불화의 화려한 색감을 표현하기 위한 기술들(이채색, 금니 등)은 사실 주변국 등에서 이미 다 발견되는 기술들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중요하지도 않은 드론의 각 요소 기술들의 대단함을 애써 표현했던 것처럼, 고려불화 역시 기술적 우월성에 대해서만 논의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것으로부터 고려불화의 진정한 가치를 논하기에는 약간 부족하고 식상한 느낌이었다. 본서 콜렉션에 실린 46개 고려불화 작품의 설명을 보면, 유독 배치’, ‘도상이라는 표현이 빈번히 등장한다. 그만큼 배치를 어떻게 하느냐, 무대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런의미에서 벌써 700년도 전에, 두 세계의 융합을 통해, 다음의 철학을 전하는 고려 화사야 말로 4차산업혁명 이전의 진정한 혁명가들이 아니었을까?


철학 1)

극락왕생으로 자신의 구제를 성취한 자는, 거기에 머물지 말고, 나아가 아미타의 인도로 비로자나의 세계를 향한다.

철학 2)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화엄의 우주를 편력하고,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즉 자신이 세상 모든 것과 연결되어, 타자를 구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박준성

2017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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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J(블랙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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